
잘난 척 하는 입술로 내게 키스해
by 공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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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림은 자신이 나쁜 남자라고 생각한다. 성질머리가 못됐다는 게 아니라, 흔히 통용되는 팜므파탈 바람 같은,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그런 남자. 그렇게 되고자 노력한 적은 없다만 싸대기 수십 번이요 저거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소문은 일상, 이번에는 정말 진지하다는 말에 텅 빈 열 손가락부터 보고 쯧쯧 소리 듣는 건 욱할 거리조차 못됐다. 그러나 하림은 조금 억울했다. 누가 나쁘고 싶어서 나쁜가. 그렇게 따지면 알면서도 넘어온 쪽 잘못도 있는 거 아냐? 물론 이 말을 들은 한결은 기함하면서 아직 네가 살아있다는 게 이 세상이 따듯하다는 증거다...... 라고 했지만. 그러나 요즘 하림의 왼쪽 얼굴이 붓는 일은 드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프린스가 하도 성행하는 탓에 개버릇 남주게 생겼다. 근 두 달 만에 만난 클럽 죽돌이 동기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모두들 진하림 진짜 이 생활 청산한거냐 아주 난리들이라며. 띄워주는 말인 게 뻔해 하림은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야 됐어. 지금 나한테는 내일 당장 풀타임 뛰어야 되는 게 제일 큰 고민이거든.”
“내일 일요일인데? 너 진짜 빚졌냐?”
“아니, 노선기가 빠진다잖아. 디저트는 어쩌라고 지가 빠져.”
“노선기가 누군데.”
“그때 우리 한결 형 카페에서 다같이 봤잖아. 그, 기집애 같이 생긴.”
“야 걔가 뭐 기집애 같이 생겼냐? 덩치도 산만한 남자를.”
“진하림 웃긴다? 이쁘장하게 생겼다고 한 건 너네요.”
그거야 성격 알기 전이고. 빠르게 내뱉은 하림이 맥주를 기울였다. 열 네 시간 후 출근이라 양껏 마시지 못하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선기 이야기는 쉬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진하림이 카페에서, 그것도 정식으로 진지하게 일하고 있다는 소식에 아는 놈들마다 처들어오지 못해 난리가 났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손을 흔드는 놈들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하림이 머쓱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결과 은찬은 하루 종일 원두를 배달하는 날이었고 민엽은 첫 휴가였다. 카페에는 오직 노선기 뿐이었다. 하림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선기에게 머리를 긁적였다. 야, 쟤네 내가 아는 애들이니까 시끄러워도 냅둬.
아닌 게 아니라 내 친구들이야, 여긴 노선기야, 하기엔 손발이 배배 꼬여 사라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노선기인데. 이 사포 같은 자식에게 소개시켜 봤자 어쩌라고 표정으로 무시할 게 뻔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암말 없이 주방으로 쏙 들어갔던 노선기가 내민 건 바나나와 초코시럽이 듬뿍 올라간 접시였다. 진하림, 네 친구들 갖다 줘. 뭐긴 뭐야. 서비스. 싫으면 내놔. 하림은 와플이 조금 눅눅해 질때까지 선기의 바쁜 등짝을 바라보았다. 맨날 뚱해선 뒷모습마저 토라진 것처럼 보이는 놈. 와플을 입에 마구잡이로 밀어넣던 동기놈들 중 하나 말했다. 쟨 뭐 일본 애냐? 좀만 있으면 아주 샴푸광고 하겠는데. 화장한 거 아냐? 진하림은 접시를 훽 뺏어들며 눈을 흘겼다. 예쁘장 하잖냐, 쟤가. 잘 익은 바나나가 무척 달았다.
다시 돌아와서. 진하림은 말도 없이 빠진 노선기가 짜증스러웠고 뭣하러 빠지냐는 제 물음에 니가 알아서 뭐하게, 라는 대답은 열 받았다. 하여간 정을 주고 싶어도 못 주게 해요. 입술을 찡그리던 하림의 어깨가 흔들렸다.
“야아. 생각까지 할 질문이냐?”
“어? 뭐가. 못 들었어.”
“니 진짜냐고. 걍 솔직하게 말해. 너 요즘 좀... 그렇잖아.”
“내가 뭘 그래?”
“노선기. 아니 너 클럽도 안 오고.”
“아 바쁘다니까아? 갑자기 뭔 노선기.”
“요즘 여자들한테는 관심 눈꼽만큼도 안 주고. 만나면 노선기 이야기 밖에 더 해?”
“그거야 같이 일하니까......”
“걍 인정해. 이새끼가 이쁘다고 했을 때부터 끝났어, 내가 보기엔.”
“아이씨, 이것들이 근데 진짜!!! 끝나길 뭘 끝나!!!”
“맞다니까.”
“어쩌냐. 그쪽에서 너한테 진짜 하나도 관심 없어 보이던데.”
하림의 손아귀에 들려있던 맥주가 절반으로 꾸득꾸득 굽는다. 네 쌍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간다. 어째 저 욱하는 성질이 요새 잠잠하다 싶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서비스업을 하나 궁금했는데 잔잔하게 깔려있던 휘발유에 성냥을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이쯤되면 나오는 말이 있다. 진하림이 가장 좋아하는 말, 가장 짜증났을 때 내뱉는 말.아마도 사십 먹어서, 결혼해서도 쭉 할 말.
“야. 내기 해? 노선기가 날 좋, 아니지 아니지. 내가 노선기 자빠트리는지 아닌지.”
저새끼는 얼굴 아니면 진짜 인생 애진작에 종쳤다...... 과연 누구랑 결혼할지는 몰라도 고생 꽤나 할 거라는 게 공통의 의견이었다. 상대방이 아니라 진하림이. 원래 망나니일수록 고삐를 제대로 쥐어보겠다는 사람이 끓기 마련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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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렇게 했다만 진지할 이유는 없었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걸 내기라 칭할 순 없었다. 문제는 진하림이 스스로 불을 붙이고 싶어졌다는 거지. 보통 과하게 날카롭게 굴면 둘 중 하나였다. 자신을 좋아하게 되던가, 좋아하고 있던가. 그러니까 결과만 따지자면 노선기는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게 맞았다. 약간의 반작용이면 되는데 문제는 상대의 정체였다. 여자라면 늘상 가는 카페나 레스토랑이면 게임 끝인데 노선기는 카페에서 일하는 남자다. 그렇다고 시커먼 남자 둘이 놀이동산을 가고 싶지도 않았고, 영화는 더 사양이었다. 노선기 영화취향이 영 아닌지라. 빠듯한 이십대 청춘 둘이 시간 죽이기에 외국어라는 것만 알겠는 자막이 들어있는 불법 다운로드 영화만한 게 없었다. 선기가 고른 것들은 죄다 뱀파이어나 피칠갑한 귀신 따위가 달려들곤 해 하림은 왁, 소리를 지르며 나자빠져야했다. 무서운 거 못 보냐? 선기의 핀잔에 하림이 짜증스레 대꾸했다. 야 놀란거지 누가 무서워해! 그게 무서워하는 거야, 멍청아. 하림은 깊게 고민했다. 뭔가 이끌어는 내야겠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짜고짜 방에 찾아도 가봤지만 선기는 책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앞에 버티고 앉자 결국 내려놓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똑 떨어지는 쌍커풀이 참 지 같다는 생각이 문득였다. 무슨 일인데. 순간 하림이 인상을 구겼다. 내가 무슨 일 있어야 네 방에 올 수 있냐. 선기는 한결 더 아리송하다는 얼굴이었다. 늘 치솟았던 눈꼬리가 아래를 향해서 둥글어진다. 답을 기다리는 입술이 삐죽하게 올랐다. 하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 노선기 오늘 같이 잘래? 너 미쳤어?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뭔데 그래. 진짜 고민 있어? 형한테조차 말을 안하고.”
“내가 뭘.”
“어쭈. 이게 짤리고 싶어서......”
“됐어. 아무도 도움이 안 되네.”
“뭐, 돈 없는 건 아닐테고. 심심하냐? 회식이라도 해?”
한결은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숙였다. 툭 나온 하림의 입술은 들어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름 야무진 놈이 바닥 위 쓰레기만 밀어내고 있는 꼴이었다. 통 힘이 없어 보여 선기에게 물어봤지만 하루이틀이에요, 라는 평소의 싸가지로 소득 없이 끝났다. 그럴 생각이 들면 와라. 멋있는 위로와 토닥이던 손길은 진하림의 단말마로 반토막이 났다.
“어어, 회식 하자 형. 애들 다 오는 거 맞지? 노선기 불러. 그러니까, 내 말은 마이찬이랑 황민엽도.”
신이 내린, 아니 한결이 내린 어쩌면 절호의 기회였다. 진하림 사전 1장 6절. 모든 건 기회다. 노선기는 한결이 돈 주는 사람이랍시고 더 대우해주니까 술도 받아먹을 게 틀림없었다. 취기가 제대로 오른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온 몸이 발긋해져선 휘청휘청. 그나마 덩치가 있는 한결이 부축해 집에 들어갔었다. 다음날 저거 순 여시라는 하림에게 짜증을 벌컥냈다. 내가 너야. 그리고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너가 더 민폐야. 그날 또 다투긴 했는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아무튼 노선기는 지금 나랑 살고 있으니까. 멋지게 들쳐업고 가는거지. 뭐 잘만하면 진도도 혹시 알아? 야아 노선기! 시간 비워 놔라? 의기양양하게 주방으로 향하는 하림에 한결이 어깨를 들썩였다. 또 뭔 짓 할라고 저래.
진도는 무슨. 앓는 소리가 절로 나갔다. 아, 진짜 머리 깨질 거 같네. 하림이 이불 위를 뒹굴었다. 서랍장에 어깨를 박아 악하고 비명까지. 선기는 출근 준비 중인지 물소리가 희미했다. 어제 얼마 안 마셨는데. 아니지. 마이찬은 밥만 먹곤 갔고. 황민엽은 제일 먼저 나가떨어졌고. 그 새끼는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맨날 그지랄이야. 한결이 형이 웬일로 고은찬 어쩌고 해서... 노선기랑 형이랑 나랑 셋이 마셨는데 의리하면 진하림 아니겠냐. 내가 또 맞춰줬지. 진짜 존나 좋은 동생이다. 이런 동생이 어딨어. 돈 주고도 못 구해요! 씨바 노선기 의리없는 놈 같이 좀 마시지...... 겨우 일어나 컵을 쥐었으나 물비린내에 속만 더 배렸다. 퓨즈가 덜 켜진 듯 시야가 휘청였다. 다시 뒤로 넘어가 털썩 누우니 방문이 열렸다. 어휴. 적나라한 한숨에도 할 말이 없었다.
“용케 죽지는 않았네.”
“나 머리 깨졌나봐.”
“내가 어제 확인했는데 깨지진 않았어.”
“잠깐 있어봐.”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기어 배낭을 뒤적였다. 이것까지 계획해놨었는데 되는 게 없네. 서둘러 미지근하다 못해 뜨듯해진 숙취 해소제를 내미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 가오 없어.
“노, 큼. 선기 이거 마셔.”
“너나 마셔. 살고 싶으면.”
“아씨.......”
나갈 줄 알았는데 버티고 서서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른다. 하림은 술기운이라곤 전혀 없는 말간 얼굴을 바라보다 깨달았다. 쟤 머리가 더 길었구나. 이제는 아예 올려 묶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래도 꽁지머리에 가까웠는데. 덜 마른 머리에서 물방울 두 개가 무릎 옆에 나란히 떨어졌다. 똑, 소리에 멀리서 일본어가 귓가로 먹먹히 스며들었다. 스고쿠 오모이네... 저를 업다싶이 끌던 노선기가 내뱉은 말이었다. 계단 밑에 던져진 진하림 옆에 주저앉아 겉옷을 벗는다. 그리고 맨 어깨에 볼을 끈덕지게 부비며 선기야, 노선기이, 하는 자신까지. 하림이 이마를 짚었다. 쌍욕이 절로 튀었다. 속이 어지러운데 숙취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와, 존나 기억 안 나는 척 해야지.
“야 진하림.”
“아 뭔데에. 왜, 또.”
“모레 시간 비워놔. 잠깐 나가게.”
“어엉? 뭔 소리야.”
“그냥, 밥이라도 먹자고.”
“너랑 내가?”
“너랑 나만.”
“허 참내. 너......”
“오후 한시.”
알다모를 얼굴로 죽었다 깨나도 모를 소리를 한다. 늘 그렇듯 지 말만 하곤 뒤도 안 돌아보는 저 싹퉁머리. 일정이 있냐고 묻지도 않는 건 당연했다. 창문 속 아침 햇살이 너무 강해 머리가 슬쩍 아파왔다. 씁쓰름한 결명자 향이 목구멍에서 확 피어났다. 진짜 짜증나는 건 마시니까 좀 살겠다는 거다. 병을 비우기도 전 십분 빠른 뻐꾸기 시계가 울렸다. 지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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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건 없었다. 하림은 선기가 피자를 좋아한다는 걸 이 날 처음 알았다. 얄팍한 볼이 터질 듯 우물거렸다. 야... 너 지금 완전 은찬스러워. 라는 말엔 샐쭉하게 째리며 핫소스 통을 집어든다. 초밥만 먹게 생겨선 매운 걸 꽤... 얘 그러고 보니 막창 좋아한댔지. 저리 잘 먹는데 대체 어떻게 말랐대. 하림은 두 번째 조각을 잠시 내려놓았다. 천천히 먹어어. 나 손 딸 줄 몰라. 알고 보니 그 노선기가 햄버거, 통닭, 온갖 튀김 같은 패스트푸드를 좋아한단다. 하림은 듣기만 해도 속이 느글대는 것들이었다. (진하림은 비오는 날 꼭 막걸리에 감자전과 파전을 곁들여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깬다고 차인 적도 있다......) 그런데 왜 한 번도 먹는 모습을 못 봤냐 묻자 참는 거라고. 엥 뭐하러? 그걸 어떻게 삼시세끼로 먹어. 돼지도 아니고. 저기까지 들으니 더 이해 안 가는데 일단 그렇다 쳤다. 밥을 다 먹고도 어째 일어날 생각이 안 들어 직원이 기웃거릴 때야 아차 싶었다.
토요일 이른 오후임에도 길거리는 한적했다. 하림은 새삼스레 밖에서 보는 노선기가 낯설었다. 처음도 아니면서. 시내서 돌아다니는 곳이 거기서 거기니 마주칠 때도 있었고 애초에 같이 사니까. 어느 주말 프린스들끼리 다 같이 영화를 보러간 적이 있었다. 노선기는 옷을 조금 튀게 입는 편이다. 진하림도 무난함을 고집하는 건 아니었지만 길이 한참 달랐다. 아니, 흰 티도 그냥 흰티 입으면 되지. 뭐 프린팅이 들어가던가. 노선기는 꼭 안이 비칠락 말락한 티를 입었다. 허리를 쭉 피면 선이 아주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찰랑찰랑한 그런 류. 게다가 가끔 무릎 위로 오는 반바지를 입곤 했는데 하필 그 티셔츠가 엉덩이를 덮는 길이였다. 진하림이 누구냐. 절대 참지 않고 이빨을 터는 사람 아니겠어. 기집애냐? 뭐야, 그게. 노선기의 눈초리가 곧장 희번덕거렸다. 니가 뭣도 못 가리는 수준인건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네. 참 나, 기집애처럼 입고 다니면서 기집애 소리 듣는 건 엄청 싫어하더라. 니 의견 안 궁금하니까 입 닫지 그래. 아니 내 말이 틀렸나? 어? 한결 형, 형이 말해봐. 결국은 양끝 자리로 쫓겨났다. 지금 그게 생각나는 이유는 노선기가 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왔기 때문이었다. 근데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꼴갑이네 싶었는데 왜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안 들지. 노선기는 헛기침을 연신해대는 진하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또 기집애 같냐?”
“그런 말 안했는데 찔리냐?”
“하여간 지도 잘 입는 편도 아니면서 엄청 따진다.”
“이뻐서 쳐다봐도 싸가지 하고는.”
“뭐?”
“아이스크림! 새로 연... 옷가게 옆에. 먹자.”
하여간 안에서 먹으면 되지. 아무리 투덜거려도 혀만 날름거리는 게 꽤 얄밉다. 가게는 싼 가격 탓인지 뭔지 사람이 넘쳤다. 선기는 말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야아! 솜사탕 맛 아이스크림과 딸기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양 손에 쥔 하림이 서둘러 외쳐봤자였다. 언제 봐놨는지 그늘진 벤치에 앉은 선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많은 거 딱 질색이야. 난 이런 니가 질색이다...... 그럼 넌 들어가. 이거나 받으셔. 솜사탕 맛이라니. 쟨 아이스크림 맛마저 낯간지럽다. 하림은 문득 노선기가 만드는 것들이 얼마나 달콤한지 떠올린다. 입천장이 나갈 만큼 바삭바삭하고 안에는 포근한 크림이 가득한 것들. 노선기는 왜 저럴까. 찬이 남자여도 상관이 없었을 거라 중얼거리던 선기가 스쳤다. 남자여도 서로 좋으면 된 거지. 뭐가 그리 화났는지 발끈하던 것까지. 아이스크림을 너무 급하게 베어문 건지 명치가 시큰거렸다.
“야 선기야.”
“왜.”
“너 오늘 입은 거 있자나.”
“어.”
“자주 입어라.”
“자주 입잖아.”
“그니까 자주 입으라고.”
“뭐야......”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도 혓바닥만 미끌거릴 뿐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이제 가는 건가? 해가 지려면 반나절은 남았고 어차피 집에 가려면 함께였다. 이대로 들어가 각자 방에 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렇다고 둘이 카페를 가기엔 그게 더 우스웠다. 손을 털던 노선기가 뒤를 훽 돌았다. 저기 게임방 있다. 오호 빨래랑 설거지 걸고 농구게임?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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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노선기가 약간은 물렁해졌다, 고 하림은 생각했다. 전에는 붙기만 해도 떨어지던 놈이 이제는 가만히 있는 걸 보면 그랬다. 가끔 부채를 부치면 은근 뒤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땀 냄새 안 나? 응, 안 나. 얌전히 눈을 감고 바람을 맞는 선기에게 하림이 일렀다. 너 그럴 때마다 부잣집 고양이 같어. 부잣집이 뭐냐? 아무튼 고양이. 눈을 감고 씩 웃는 노선기라니 이 정도면 감격스러워 해도 되지 않나. 은찬에게 묻자 모르겠는데? 형 그런 것도 신경 써? 라는 답변이 돌아왔으나 뭘 알지도 못하는 꼬맹이 의견 같은 건 됐고. 철벽인 여자의 번호를 땄을 때랑은 좀 다른 느낌이다. 뿌듯함이라 보기엔 밀도가 높았다. 귀 끝이 간질거려 괜히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게 된다. 그러니까 방금처럼 눈이 마주친 노선기가 전처럼 매정히 돌아서는 게 아니라 눈을 한 번 굴리고 숙인 고개에서 살짝, 정말 살짝 부푼 광대를 보게 될 때면 그러했다. 웃길 거 하나 없는데 그래서 웃겼다. 뭐가 좋길래 그렇게 입이 찢어져? 민엽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금요일 치고는 손님이 드문 날이었다. 주문이 끊기진 않지만 테이블 수는 넉넉했다. 때문에 일찍 가보겠다는 한결에 선기가 은찬까지 떠밀어 카페에는 셋 뿐이었다. 느긋한 오후엔 한동안 하림을 본다고 출석을 찍던 손님이 간만에 찾아왔다. 어어 너! 와 간만이다? 오빠 그동안 여자친구는 생겼어여? 아니, 소개 좀 해줘봐. 안 그래도 남자들만 드글드글 죽겠어. 손님은 케이크를 내밀고 떠났다. 카페 일하는 사람에게 케이크가 뭐냐니까 먹으면 마음이 달라질 거란다. 오빠 여기 몰라요? 케이크만 파는데 진짜, 먹는 순간 파리. 먹으면 알아요. 그 손님을 끝으로 카페가 텅 비었다.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는 건 선기였다. 어디갔나 했더니 농땡이 부렸구만. 자, 이거 너 먹어라.
돔 모양의 종이상자에서 나온 케이크는 크림치즈가 잔뜩 올라가 누가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선기의 손가락이 탁자를 톡톡 내리친다. 하림은 뭐 마려운 동네 개처럼 주변을 기웃거렸다. 반응이 영 별로다. 아니... 솔직하게 심기 존나 불편해 보이는데. 왜?
“집 가서 먹을라 그래? 야, 안 먹을 거면 줘.”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야, 멍청아.”
“살 빼냐? 너도 막 여자애들처럼 다이어트 해?”
“그렇다 치자.”
“뭐야. 뺄 데가 어딨다고. 이러다 밥도 안 먹겠다 하겠어?”
선기의 눈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어라, 이 표정 간만인데. 다시 포장한 상자를 제 쪽으로 민다. 지체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선기의 뒤로 하림이 목청을 높였다.
“맞다, 너 까먹진 않았지?”
“뭘.”
“옷 고르는 거. 도와달라고 했잖아.”
“아 그거 못 갈 거 같은데.”
“뭐?”
“약속 있던 거 깜빡했어.”
“야, 그러는 게 어딨어!”
“너 애초에...... 됐다.”
“왜 저래?”
맥이 탁 풀렸다. 진짜로 왜 저래. 뭔 삐진 여자친구 마냥. 케이크는 냉장고로 들어갔다. 평소 냉장고를 손에 꼽게 여는 걸 알아 휴대폰을 들었다. [ 케이크 냉장고에!!! -_- ] 문자에 답은 당연히 없었다. 지가 뺄 살이 어딨다고. 약속은 땡쳤다만 이대로 미룰 수는 없었다. 가출 아닌 가출을 했더라도 할아버지 환갑잔치는 가야겠는데 옷이 없었다. 짐 좀 제대로 싸서 나올걸. 선기에게 옷을 빌려달라 해봤지만 절대 싫단다. 한결 형한테 빌려야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그냥 하나 사. 너 안 그래도 옷 없다며. 같이 봐줘? 아니 이것 봐. 따지고 보니 노선기가 먼저 시작했잖아.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그건 그렇고 진짜 귀찮아 죽겠네... 돈 없는데. 그냥 밥이나 먹고 옷은 빌릴까. 머리를 벅벅 긁다말고 고개가 돌아갔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기인한 눈치였다. 조명 빵빵하니 사방이 거울이라 중삐리들이 꼭 셀카 한 번씩 찍고가는 곳. 하림은 온갖 머리끈과 머리띠 반짝이삔 목걸이 귀걸이가 다발로 쌓인 코너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보는 게,
“사장님도 머리 있으시잖아요.”
“아, 진짜! 이런 식으로 협조 안 하면,”
“...진하림?”
“뭐? 어디.”
최한결이랑 노선기가 맞는 거지. 그것도 싸구려 삔을 꽂아주려 애쓰는. 잘들 논다. 제 말에 한결에게 손목이 잡혀있던 선기가 급하게 몸을 틀었다. 하림은 당장 마트를 벗어났다. 야, 진하림! 조금은 절박한 노선기 목소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다급한 발소리는 버스까지 이어졌다. 가쁜 숨을 내쉬다 뒷자리로 향하는 모습이 웃기지도 않았다. 엠피쓰리 속 어제까지 제일 좋았던 팝송이 짜증스러웠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선기가 뱉은 말은 그런 거 아니야, 였다. 기가 차 코웃음을 친 하림의 방까지 조르륵 쫓아온다. 평소에도 이러면 좀 좋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쏟아내고픈 게 한가득인데 머리는 뚜껑이 덜컥이는 주전자처럼 어지러웠다.
“곧 고은찬 생일이잖아.”
“근데?”
“생일 선물 고르는 거 도와달래서 갔던 거야.”
“그러면 나를 데려가도 됐을걸.”
“너는 못 믿겠나보지.”
“말 계속 그렇게 해라.”
“너야말로 왜 이렇게 삐딱하게 나와?”
올해 여름은 무척 무더울 거라고. 오후 라디오들마다 강조했다. 강도 높은 폭염이 지속될 전망이며 가급적 햇빛을 피하며 수분 보충을 자주 해주셔야겠습니다...... 선기가 그날 잘라준 수박은 물수박이었다. 수박 많이 먹으면 탈 나. 무신경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지. 혼자만 있어도 더운 날과 방에 둘이 있으려니 땀이 등을 타고 달려갔다. 하림은 젖어 갈리지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씨. 아침에 했던 샤워가 말짱 도루묵인게 짜증나 지른건데 선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굳이 정정하고 싶진 않았다.
“케이크 까지 받아먹었으면서 다른 약속 쪼르르 달려갔는데 너 같으면 성질이 안 나겠냐, 그럼?”
“내가 달라고 했어? 먹지도 않았고, 니가 준 것도 아니잖아. 손님한테 받아서 준 거 알아.”
“야, 선물에 마음이 중요하다 한 건 너잖아! 안 먹은 것도 니 선택이고!”
“나 견과류 알러지 있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니가 오늘 그렇게 짜증낸 한결이 형은 알던데.”
시큰둥히 누워있던 하림이 상체를 세웠다. 낮게 흐르는 호흡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선기가 고개를 뒤로 물려 명도가 짙어진 햇빛이 콧대로 드리웠다. 하림은 망설이지 않고 더 다가갔다. 마주친 홍채가 생각보다 짙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훨씬 머리가 시끄러워지며 관자놀이가 그만 뜨끈해졌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날까. 선기가 물었던 게 스스로에게 맴돈다.
“옷은 혼자 사도 되잖아.”
“한결 형은 혼자 못 사냐?”
“...너 어차피 그거 입고 여자 만날 거잖아.”
“그럼 안되냐?”
“뻔하지.”
“아니 노선기 너가 무슨 상관인데. 가만 보면 너 나한테만 참견질 해대. 알아? 무슨 지가 내 마누라야 뭐야.”
선기의 입매가 분명하게 떨렸다. 무언가 들어간 것처럼 눈꺼풀에 힘을 잔뜩 준다. 노을이 민망해할 만큼 불그스름한 색에 하림의 입이 다물렸다. 어쩐지 속이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조금씩 맺혔던 땀이 옷에 스며들어 온몸이 나른하게 우물거렸다. 위에 올라탄 선기가 고개를 숙이자 귓가가 먹먹해졌다. 갈라진 걸 한 번 못 본 입술이 시야에 담긴다. 선기의 속눈썹이 가지런히 깔렸다. 마트를 벗어나 햇빛을 쬐였을 때부터 방망이질 치던 심장소리가 요란했다. 수면 위를 떠돌 듯 느슨한 의식 속 뭉근한 온도의 혀와 체온만이 선명했다. 눈물샘이 아프고야 내내 눈을 못 감았다는 걸 알았다. 입술은 손이 허리로 향할 때쯤 떼어졌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빼드는 바람에 또 스칠뻔한 걸 선기가 물러났다.
“너... 너 미쳤냐? 진짜 더워서 돌았어?”
“웃기고 있네 좋아 죽어놓고.”
“야 이거 성추행이야!!!! 이씨, 노선기. 이게 진짜,”
“진하림. 너가 니 마음 못 받아들이겠다 해서 그렇게 굴어도 되는 건 아니야.”
“뭐?”
“너 나 좋아한다고, 병신아.”
하림은 그만 현기증이 났다. 정말로, 지독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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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노선기랑 싸웠지.”
“좀. 다들 신경 꺼.”
신경질적으로 잡아채진 카푸치노가 트레이에 넘쳐흘렀다. 한결이 뜨악한 얼굴을 했다. 저런 태도는 노선기 껀데. 정작 선기는 생크림을 짜며 뭐가요? 라더라. 이새끼들이 같이 사니까 안 좋은 것만 전염병처럼 옮아가지고...! 원래도 실수가 드물지만 최소한으로 딱딱 움직이는 진하림은 낯설었다. 선기만 빼고 모두들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근 삼주 째였다. 전날 싸우면 다음날 떡튀순 포장해가는 놈들인데. 이는 선기가 우선 사과를 받으면 너그러워지는데다 하림의 변죽이 좋은 것에 있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그 진하림이 손님과 말다툼을 했다. 예, 저도 자주 오는 건 아는데요. 그렇다고 사람 사진을 막 찍어요? 서비스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이. 결국 한결이 나서서 말려야했고 카페는 한층 더 얼어붙었다. 선기는 짜증스럽다는 듯 잠깐의 쉬는 시간마다 탈의실로 올라갔다. 이어지는 계단을 흘끗거린 은찬이 하림에게 다가갔다.
“말해봤어?”
“아직.”
“빨리 말해. 그러다 진짜 큰일 날라.”
“큰일은 무슨 큰일. 알아서 하께에.”
“애초에 잘된 거긴 해. 거기 방문도 안 달려있었잖아. 홍사장님 집이니까 뭐 함부로 할 수도 없구... 짐 옮기는 건 힘들겠지만. 내가 도와줄게.”
“뭐?”
아이고 말해주려 했는데. 한결은 모른 척 살기등등한 노선기를 등졌다. 결국 작달막하게 진짜 큰 소리 나기 전에 따라와, 라더니 하림을 끈다. 가는 내내 씨름을 멈추지 않는 둘의 인영이 사라지자 한결이 외쳤다. 고은찬 너는 노선기가 다 듣게 이야기를 하냐! 뭐래. 들으라고 한 건데요. 가끔 보면 진짜 눈치 없다니까. 하림은 테라스까지 끌려가서야 팔이 놓였다. 손끝이 팔뚝을 긁듯 스치는 게 쭈뼛했다. 순간 한발자국 떨어진 걸 봤는지 선기의 서슬이 한층 파래진다. 머쓱해진 하림이 뒷목을 매만졌다.
“놓고 말하라고.”
“보다보니 어이가 없어서. 왜 너가 지랄인데?”
“지랄 안하게 생겼냐?”
“야 진하림.”
“내가 배려해준다는 생각은 안해?”
“그렇게 배려해서 사람들이 다 니 눈치 보게 만들어? 주방 오는 일 황민엽 시키는 거 모를 줄 알아? 근데 이젠 집을 나가.”
“아니라고.”
아 눈치 개빠르네 진짜. 괜스레 몬스테라나 건드리자 줄기를 팍 때리는 손이 매서웠다. 마음같아선 니치고 싶은데 씨발 함만 참아준다는 얼굴이다. 변명 하자면 집을 나갈 생각은 정말 없었다. 카페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다른 곳 반의 반값인 곳을 미쳤다고 포기해. 그런데 방에 비가 자꾸 샜다. 홍사장님께 말하니 수리 기사를 부르겠지만 오래 되어 어쩔 수 없단다. 그래서... 여름까지만 방을 함께 쓰면 안 되냐고 말할 작정이었는데 그럴 수가 있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니 좋다는 남자랑 방을 쓰라는 건 스스로도 양심머리 없는 짓이었다...... 사심 있는 거 같잖아. 그니까 사심 있는 건 맞는데. 아니, 쟤는 입술에 뭘 저렇게 꼬박꼬박 바른대. 아씨 또 생각났잖아. 이런 속도 모르고 노선기는 또 한 발 더 다가온다.
“뭐가 아닌데.”
“아 아니라면 아니지!!”
“이게 그러고도 사내새끼라고......”
“야, 뭐라고?”
“넌 남자 좋아하는 게 그렇게 쪽팔리냐?”
그런 거 아닌데. 대답이 늦긴 했지만 멱살을 잡을 거 까진 없지 않나. 멱살을 한두 번 잡힌 건 아니다만 상대 때문에 곤란했다. 셔츠 깃을 야무지게 붙든 손을 잡았다가 후다닥 떨어졌다. 그게 또 화를 돋은 듯 했다. 치아끼리 뿌득대는 마찰음이 말 중간에 섞였다. 하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선기는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과민하게 굴까. 피해주겠다는데 왜 늘 자기가 나서서 말이야... 오지랖도 넓은 놈. 순간 묘한 마음이 일었다. 진하림이 노선기에게 오지랖이 넓은 놈이라고 말한다니. 선기의 눈은 평소처럼 뾰족했고 흘기듯이 날이 서있었다. 노선기는 늘 진하림을 이렇게 쳐다본다. 아마도 진하림이 이빠이애국자데스요를 했을 때부터인가. 너 일본어 디게 잘한다. 내가 전에 일본인 여자친구가 있었거던. 했을 때부터? 그도 아니면 나 원래 단 거 지인짜 싫어하거든. 근데 니가 만든 건 맛있다, 야. 한결이 형 우리 카페 잘 되겠는데? 외쳤을 때였나. 하림은 다시금 자신의 멱살을 잡은 손을 그러쥐었다.
“선기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아니.”
“너 그때 나 왜 불렀어. 피자 먹은 날.”
“물을 걸 물어.”
“일주일 뒤에 내 생일인거 알았지. 그래서 놀자 했지.”
“야, 됐거든.”
“이거 여시인줄 알았는데 순 부끄럼을 다 타네.”
“말을 말자. 니랑 뭘 하겠냐......”
내가 졌다. 하림이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저보다 좀 더 짙고 째져 고양이 같은 동공이 한 박자 늦게 흔들린다. 폭 패인 볼이 잡혔답시고 눌리는 게 귀여웠다면 미친 거지. 노선기의 입술은 그때랑 다르게 살짝 인위적인 향이 났다. 역시 립밤을 바르는 게 맞았네. 혀가 뿌리를 감았다 치열을 훑으려 들 때 고개가 훽 내빼졌다. 이젠 노선기가 두 발 떨어지는 게 제법 뿌듯하기까지 하다. 손등으로 입을 막곤 일본어를 중얼거리는 걸 무슨 뜻이냐 묻기도 전에 구두코가 날아왔다. 눈에 별이 튀었다. 영국제 부츠는 저 정도로 단단하구나...... 악!!! 비명에 평정을 찾나 싶더니 와, 야. 아... 존내 아퍼. 너 방금 진짜 이뻤다 선기야. 를 듣고는 경악으로 물든다.
“아까 뭐라고 한 건데? 아, 씨. 진짜 쎄게 때렸네, 니.”
“까불지 말라했다 이 미친놈아.”
언젠가 노선기가 영화를 보면서 말한 적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시선을 살짝 비끼자 달아오른 귀 끝이 들어왔다. 하림은 명치 부근 왼쪽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아주 견갑골을 뚫고 나올 듯 펄떡인다. 팔월의 직사광선이 선기의 상기된 뺨에 튕겨진다. 1층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나지막했다. 선기가 아주 귀하게 종알대던 선율이었다. 고백하자면 네 노래를 들을 때 아주 부끄러워 진 적이 잦았다고. 알려줄 기회가 오길 빌어본다. 다시 다가서도 피할 마음이라곤 전혀 없어 뵈는 가쁜 숨이 사랑스러워 하림은 네 심장도 이러냐는 물음을 생략했다. 길이가 더 긴 속눈썹이 먼저 내려앉는 걸 본 동그랗고 진한 동공이 마저 모습을 감췄다. 정말로, 진하림 인생에 다시없을 참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