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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홧김에

​by 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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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술김에 저지른 약속이 피부로 와닿자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당일이 되자 책임감 없다는 말이 듣기 싫어 무작정 데리고 나온 곳이 카페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난다. 영화라도 보고 술 먹고 들어가면 되겠지 싶어,

 "너 무슨 영화 좋아하냐? 액션? 로맨스? 코미디?"

 "나가자."

 "어디로?"

 "카페보단 낫겠지. 재밌을 거야. 생각보다."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지만 생각 없이 툴툴거리지 않았다. 며칠 하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벌써 이주가 넘었다. 무려 '첫 번째 데이트'다. 한 번씩 데이트 코스를 짜오기로 했는데 처음부터 하림이 차례였다. 큰소리는 쳤고 먼저 제안도 했지만 생각이 복잡해 미처 짜오지 못했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노선기가 데려온 곳은 휘황찬란한 빛이 펼쳐진 오락실이었다.

 "뭐해? 안 들어오고."

 "야하, 여기에 오락실이 다 있었네?"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 내가 쏠게."

 "뭐 뭘?"

 "별생각 없었지?"

 "... 미안해."

 "그럴 줄 알았지. 뭐부터 할까?"

 후드득 떨어진 만 원어치의 500원짜리 동전을 한 손에 모아 쥔 선기가 되물어온다. 정말 얜, 진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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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찬!! 언제 왔어?"

 "방금 왔지~ 형 오랜만이다?"

 "어어 엄청 엄청나게 보고 싶었다 마이찬!!"

 울면서 안으려고 하자 한결이 형이 가로막는다. 하 참나 치사하게 고은찬 지거라고 아주 어? 너무하다 너무해 은찬이 침 발라놨다고 아주 어? 어이없네? 안아보지도 못하냐?!

 "어 못해. 내 거야. 아무도 건들지 마."

 "웬 질투?"

 "... 싫어?"

 "아니 너어무 좋아 더해봐."

 와 진짜 저 커플 염장질 오랜만에 보니까 복장이 뒤집힌다. 누군 연애 못해서 안 하나. 맞다 사귀는 사람이 없어서 안 하는 거. 부럽다 부러워. 카페에 사람도 없겠다, 고은찬의 귀국 겸 졸업 축하를 할 겸 청소는 내일 일찍 와서 하자며 불을 다 끄고 고깃집으로 출발했다. 역시 고은찬은 은찬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고기를 구워서 접시에 올려주기 무섭게 한두 번 씹고 바로 삼키기 바쁘다. 혓바닥이 문제가 아니고 식도가 데이는 거 아냐?

 "너 유학 가서 뭐 먹고 지냈냐?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식혀서 먹어. 아무도 안 뺏어 먹는다고."

 "왜, 잘 먹는 게 보기 좋구먼. 먹기 싫으면 얘 고기나 더 구워줘라."

 "아냐 아냐 나 먹고 있어."

 언제 봐도 사주는 보람 있게 복스럽게 먹는 은찬을 보면 먹방을 보는 기분이라 입맛이 돌았다. 이 활기가 너무 그리웠다. 얼굴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겨갖고는 비는 시간이 생기면 책이나 들고 읽는 노선기나, 텐트를 쳐놓고 구석에서 낮잠을 자는 홍 사장님이나, 하루 종일 내내 멍 때리며 은찬이를 그리워하는 한결이 형이나.. 모두가 은찬이를 바라보고 웃음꽃이 활짝 폈다.

 "너희는 언제 결혼할 거냐?"

 술 한두 잔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알딸딸하게 취한 홍 사장의 술 주정이 시작됐다.

 사레들린 한결이 형은 켈록켈록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아 뭐 그런 걸 물어봐요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결혼 이야기야~ 물 마셔 물. 은찬은 한결이 형의 등 툭툭 두드리며 물컵을 건네준다.

 "뭐어~ 그럼 됐고. 선기는 그 여자 언제까지 기다릴 거냐?"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하림이 너는 언제까지 오래 안 사귀고 단기 연애만 할 거냐? 손님들에게 추파도 그만 던져야지. 컴플레인이 끊이지 않아요. 요즘엔 자중한다고 안 하지만 말이야."

 "아휴 잔소리 그만! 완전 꼰대야. 홍 사장님도 결혼 못 했으면서 그만해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다 사장님의 입을 막을 겸 이제 그만 여기서 떠나야 하나 집에 모셔놓고 2차를 갈까 눈치를 보고 있는데 눈치 없이 엔젤만 찾던 민엽이 서두를 던졌다.

 "둘을 합쳐서 반으로 나누면 완벽할 텐데."

 "진하림이랑?"

 "아 싫어!! 그럴 바엔 나 혼자 산다!"

 "나 봐봐. 나는 우리 엔젤밖에 없다고~ 오래갈 거야."

 옆에서 딴 얘기 하는 민엽을 째려보다 결국 뒤통수 한 대를 갈겼다. 아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기분 나쁘다?

 "계산하고 올게."

 "나도 같이 가."

 은찬은 슬그머니 일어나는 한결이 형 뒤를 졸졸 쫓아간다.

 "내가 꼭 이번에 연애하면 오래간다! 두고 봐!"

 "너랑 사귈 여자가 불쌍하다."

 "왜 네가 신경 써?"

 "서로 맞춰가는 게 연애지.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생각 안 하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잖아 그게 문제라고."

 "네가 나랑 사귀어봤어?"

 "헤어질 때마다 듣는 게 '나를 진짜 사랑해?' 아냐?"

 "뭐? 이게?"

 "문자로 차이면 다행이지. 나 같으면 번호도 바꾼다."

 "그럼 나랑 사귀어봐! 어? 사귀어보고 그딴 말 해보라고!"

 "내가 너랑 왜?"

 "자신 없어? 오래갈 자신 없나 보네?"

 둘이 오래 솔로로 있어서 미친 건가? 아니면, 취한 건가? 졸지에 안방 1열 직관을 하고 있다. 계산을 하고 오면 이야기가 마무리될 줄 알았더니.

 "쟤네 왜 저래요?"

 "모르겠다 나도. 보기엔 어어엄청 심각해 보이는데 실상은 별거 아닐 거야."

 "술은 다 깼어요?"

 "어어 대충."

 "여기 술 깨는 약 사 왔어요 좀 드세요."

 "역시 은찬이밖에 없네."

 "누님 나도 주세요."

 "먹어 먹어. 그냥 둘 싸우게 내버려 두고 우리 몰래 갈까?"

 "한결이 형!"

 음식점에서 나와도 실랑이를 하는 하림과 선기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도 없어 조금 멀리 떨어진 채로 있었더니 골목이 울리도록 크게 부른다.

  "어어.. 어 왜?"

  "동영상 찍어줘."

  "어?"

 

 "두 달 월급을 걸고, 먼저 헤어지자고 듣는 쪽이 지는 거다? 이유도 타당해야 해.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네가 찬 적이나 있냐?"

 ".... 아 됐고! 할 거야 말 거야. 대신 키스 같은 건 안 해."

 "하, 누가 하고 싶다고 했냐?"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그래. 그러자."

 "그래! 우리 사귀는 거다?"

 "까짓것 사귀지 뭐. 데이트는 일주일에 한번?"

 "그래 한 번이면 충분하지."

 "서로 교대로 짜오는 걸로 하고. 콜?"

 "받고, 다른 사람 만나지 않기로."

 "좋아!"

 

 악수를 끝으로 교섭은 성립됐다. 증인은 하품하는 민엽, 그리고 은찬과 한결 커플. 홍 사장님은 피곤하다고 택시 타고 집에 가서 보질 못했다.

 

 

 내가 얼마나 잘하는데, 두고 봐라 한 게 7시간 전이다. 연애. 그것도 계약이 들어간 연애를 진짜, 해 버린, 거지? 물릴 순 없겠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받은 동영상을 보면서 심란해졌다. 계약 연애도 연애니까, 나름 충실하게 다른 사람을 사귀면 안 된다는 약속도 해버렸죠? 바보 같은 자문자답을 한 하림은 바닥을 일단 굴렀다. 그것도 소리 지르면서 굴렀다.

 미쳤지 미쳤어 정말 미쳤지. 노선기랑 연애? 여어언애?? 정말 돌아버리겠다.

 

 침대 위에서 마구 구르던 하림은 결국 울면서 출근을 했다. 노선기 뿐만 아니고 커프 식구들을 어떻게 보지? 아니 노선기가 진짜로 하겠어? 흐지부지되겠지 뭐. 쓸데없는 해프닝이었다 치고 넘어가자고 하자.

 

 

 "어 애인 왔네?"

 

 소리에 입술을 억지로 올려 어 그래. 애인 왔다. 할 수밖에 없었다.

 

 노선기는 숨길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진심인가? 뭘 하던지 애인 뭐해? 애인 이거 먹어 하면서 가열하게 놀리질 않나, 낯간지러운 호칭에 억지로 웃는 것도 이제 힘들 지경이다.

 

 "장난하는 거죠?"

 "아뇨? 진짜로 사귀는데요."

 "하하, 당연히 농담이죠 얘는 못하는 소리가 없네."

 "자기야 당당해질 필요가 있어."

 하림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목을 슬쩍 더듬는 노선기의 충격 발언에 입만 떡 벌릴 뿐이었다. 너 정말 진심이야?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꾹꾹 눌렀다. 손님들은 꺄르르 웃으며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소문 이상하게 나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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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렌트한 선기가 꼬박 4시간 운전하며 징징거림을 감수하고 데려온 곳은 동해바다였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운 햇빛, 폐부 가득 들어차는 짠 냄새,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강한 바람. 바다!

 

"진짜 바다야?!"

 

 와. 바다 오랜만이다. 하림은 팔을 크게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바다 가고 싶다는 말을 언제 들었는지.

 "바다 데려올 거면서 왜 비밀이라고 한 거야? 얘기해 줘도 괜찮았을 텐데."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너도 우리 어디 가는 건지 궁금해서 계속 깨있었잖아. 바다 가는 걸 알았으면 잤겠지."

 

 반박 불가능이다.

 

 "가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무서울 지경인데? 으, 우리 오늘만 놀아? 아니면 내일도?"

 "아직 예약 안 했어. 놀고 들어가도 될 거 같은데."

 "나 갈아입을 옷 안 가져왔어."

 "그럴 줄 알고 챙겨왔지."

 "우와 철저한 준비성, 일박 이일이라니 알딸딸한 생각하고 온 거 아냐?"

 "무슨 생각?"

 "... 나 먼저 바다 들어간다!!"

 

 와, 농담도 못하겠네. 뙤약볕 때문인지 조금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아 얼굴이 벌게진 채로 대충 신발을 벗어던진 하림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선기가 옷을 하나씩 가지런히 벗어 하림의 옷 옆에 둔다. 손님 없다고 놀다가 한결이 형에게 혼나고 분수대에서 놀던 날이 언뜻 생각났다. 자박 자박 걷다가 뛰어 들어오는 선기의 모습이 꽤 귀여웠다.

 

 

 신나게 놀고 근처 횟집에서 배 터지게 회를 먹고, 하늘이 빨갛게 익을 때쯤 노을만치 익은 등에 서로 비명을 지르며 약국에서 임시처방으로 산 화상 연고를 발라줬다. 선크림을 발랐어야 했는데. 잘 타지 않는 살성이였지만 자외선을 직방으로 맞았으니 이게 안 덧나고 배기겠냐. 일주일 지나면 각질이 허옇게 올라오겠지. 발긋발긋하게 익은 선기의 볼이 토마토 같아서 웃음이 실실 샜다. 둘이서 신나게 놀았는지 진이 다 빠졌는지 10시도 안됐건만 잠이 몰려와 연거푸 하품이 나온다.

 

 "오늘 너무 재밌었다. 다음에 민엽이랑 한결이 형이랑, 홍 사장님이랑, 마이찬이랑 다 같이 또 오자."

 "넌 언제까지 임자 있는 사람을 마이찬이라고 부를 거냐?"

 "뭐 어때. 우리 자기 질투해용?"

 

 마주 보고 누운 선기의 코를 콕 찌르자 표정이 싹 변한다. 아휴 고양이가 따로 없어 아주 앙칼져.

 

 "하지 마."

 "부러워서 그런 거지? 우리 자기? 마이허니? 달링? 마이선? 뭐가 좋아? 응?"

 

 

 일부러 느끼한 목소리를 내며 선기의 뺨을 만지자 부드러운 온기가 감쳐든다.

 

 "잘 자라."

 

 손을 떼어낸 선기는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뒤를 돌아본다.

 

 "참나. 우리 자기는 부끄러워해서 큰일인데. 나는 뭐라고 불러줄 거야?"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등에 붙어서 조잘거렸다.

 

 "진하림."

 "어?"

 "마이림? 이면 되냐."

 "푸하하 진짜 안 어울리네. 맨날 야 너, 이렇게 부르다가 이름 부르니까 좀 그릏다?"

 "싫었어?"

 "아니 별생각 없었는데 좀 낯 간지러. 아후, 자야지 내일은 내가 운전할게."

 "렌트한 차는 여기에 돌려주고 KTX타고 올라갈 거야."

 "아 그것도 괜찮겠네. 이제 말 안 걸게 자라~"

 와. 하림아 부르는건 처음아닌가? 한순간에 올라온 울렁거림에 아까 회를 무리해서 먹었나.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 소리와 열린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 냄새를 맡으며 수마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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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기는 지은 하림이 해보지 않은 것들 위주로 데이트 코스를 짜왔다. 공포 테마 방 탈출 게임도, 승마도, 테니스도 모두 다 처음이었다. 그에 비해 하림이 가져온 건 진부하면 진부할 수 있는 코스였지만. 보드게임장, 양궁장 등. 승부욕이 있는 둘은 서로가 어디에 약하고, 강한지 알게 됐다. 첫 데이트 때 한 생각을 취소할 정도로 재밌다. 다음엔 뭘 할까? 사격장도 가보고 싶어. 군대 다닐 땐 재미없었는데 넌 안 해봤겠다.

물론 점수 내기에서 진 하림은 그날 저녁을 쐈고 기분 좋게 카드를 긁어야 했다.

 

 "와, 너 사격 잘하네. 양궁도 잘하고, 뭘 쏘는 거 잘하는 거 아냐?"

 "처음 해봤어. 올림픽 선수들만 하는 운동인 줄 알았거든. 생각보다 재능이 있었네.."

 

 놀랐는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기가 꽤 귀여워 보였다.

 

 "어릴 때 재능이 있는 걸 알았으면 선수도 했겠다."

 "선수를 하려고 했지."

 "어? 정말? 운동했어? 뭐?"

 "야구를 조금."

 "왜 그만뒀냐?"

 한국으로 쫓아와서 그만둔 걸까?

 "유도가 더 재밌더라고."

 "그럼 유도는 왜 그만뒀는데?"

 "힘들어서."

 별거 아닌 이유에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

 "아. 그렇지 운동 힘들지. 그럼 다음에는 베팅 센터 가볼까?"

 "나쁘지 않지. 또 져서 울지나 말고."

 "내가 언제 울었어?"

 "핸디캡이라도 줘?"

 "응.. 부탁합니다."

 "하하, 나도 야구는 오랜만인걸. 거의 일반인이랑 다름없어."

 

 

 몰랐던 선기의 과거를 알게 되기도 했다. 남산도 처음 와봤댔고 경복궁도, 서오릉도 처음이라는 선기의 말에 장소 위주로 찾게 됐다. 한국의 멋을 알려야겠다는 이상한 애사심도 한몫했다. 가이드처럼 서울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정말 한국에 와서 단 한 사람을 찾으려 알바만 했다는 선기는 눈을 반짝이며 하림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봤고, 한국사 시간에 제대로 공부해 놓을걸 하는 후회가 조금 들었다.

노선기는 또 사진을 잘 찍는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무심하게 찰칵찰칵 찍는데 풍경도 잘 찍고 하림의 인생 사진도 몇 장 건졌다. 몰랐는데, 한복도 잘 어울렸다. 갓을 쓴 선기가 부채를 살랑거리자 조선시대 같고 멋져서 올~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그리고 정장도 잘 어울릴 줄 몰랐지.

 

 "이열, 오늘 좀 멋지다? 우리 자기 이렇게 입고 어디 가? 어? 머리는 언제 잘랐어? 어우 어색한데 완전 잘 어울린다. 좀 섹시하기도 하고?"

 "그런 게 있다."

 "우리 내일 어디 갈지 정하고 가~"

 "알아서 고를 때도 되지 않았냐?"

 "휴가라고 어? 아주 예쁘게 입고 어디 가냐 나랑 데이트하는 것도 아닌데. 애인 섭섭하다 섭해!"

 

 그야,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와주긴 하는데. 혼자 고르는 것보다 요즘엔 같이 골라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물어본 건데. 구시렁대던 하림은 아직 시간이 남았는지 카페에 앉아 시계를 바라보는 선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쟤 혹시 나쁜 짓 하러 가는 거 아냐? 선이라던가, 선을 본다던가. 손톱까지 예쁘게 자르고, 늘 칠이 반 정도 벗겨져있던 까만색 매니큐어도 안 보인다. 수상하지 않은가.

 

 ...

 진짜 선 보러 가는 거면 어떡하지?

 

 아냐 노선기가 그럴 리 없잖아. 서로에게 충실하자고 약속했는데.

가슴을 툭 스치고 지나간 바람 때문인지, 조상님이 눌러준 레드라이트가 삠 삠 울렸다. 반 충동적으로 한결이 형에게 카톡 하나를 남긴 하림은 바로 2층으로 뛰어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한결이 형 나 오늘 일 못할 것 같다. 미안. 오늘 쉬지 않으면 큰일이 생길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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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하면서도 클리셰 넘치는 대사를 해봤다.

 

 - 저 앞 택시 따라가 주세요.

 

 택시 기사님은 진지한 한결의 얼굴을 바라보며 액정을 터치하고 부드럽게 페달을 밟는다. 그 여자 만나러 가는 건 아닐까?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초조하고 짜증이 나고 죽을 것만 같고 토할 것 같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눈앞이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1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공항 근처였다. 얘 지금 일본 가는 거야? 아니면 마중 나온 건가? 초조함에 손톱만 까득까득 물어뜯으며 조용히 뒤를 밟았다.

 

 

 이런데도 있었어? 와. 맨날 여행 가고 대충 밥 먹기 바빴지. 노선기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서 멀리 100명 사이에 내버려 둬도 한 번에 찾을 수 있다. 이젠. 근데 그 앞에 처음 보는 여자가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촉만 믿고 쫓아왔지만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났다.

 

 배신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 쫓아가서 상을 엎고 물을 끼얹고, 뺨을 때리는 상상에 상상을 하다 매니저의 몇 명이냐는 질문에 한 명이라고 대답을 하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무슨 사이냐고 하면, 연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서로 자존심을 걸고 애인처럼 대하는 계약연인일 뿐인데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맞선을 파투 내냐고. 하. 커피는 또 왜 이렇게 비싼데. 다리를 달달 떨었다. 힐끔힐끔 바라본 선기는 가끔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하림은 선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야 큰일 났어 끊지 말고, 어떡하지? 오버 리액션을 펼친 하림은 결국 전화를 끊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해 잠시 화장실로 들어가는 선기를 따라가 어깨를 붙들었다.

 

 "너무하다 너무해. 예쁘게 꾸미고 나와서 바람이나 피고. 두달 월급을 그렇게 주고 싶었어?"

 "진하림? "

 

 놀란 선기는 입을 뻐끔거린다. 다시 나가려는 걸 붙들었다.

 

 "어 그래 나다."

 "네가 여길 어디라고 와."

 "저 여자는 누구야?"

 "아무도 아냐."

 "아무도 아닌데 머리도 자르고 손톱을 지우고? 나랑 헤어지고 싶었구나?"

 "여기엔 사정이 있어."

 "사정을 얘기해 주면 내가 여기까지 안 왔겠지? 뭔데 맞선이야?"

 "어. 됐지? 가라."

 

 뭐? 이렇게 끝내는 거야?

 

 "... 나 좀 섭할라그래. 어떻게 그래?"

 "너 나 좋아하냐?"

 "아니! 두 달 월급 받아서 속이 다 시원하다! 나도 이제 데이트도 하고, 어, 소개도 받고 여자 만날 거야!"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왜 네가 사과를 하냐. 아니지 사과할 일 맞는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날 것만 같지?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 갈게. 선 마저 잘 봐라."

 "나도 보고 싶지 않았어.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뭐? 그럼 왜 보는 건데?"

 "가족 압박에 못 이겨서 본 거야. 대는 이어야 한다면서."

 "뭐 그딴 가족이 다 있냐? 아오 진작 찾아가서 상을 엎었어야 했는데! 너 가족이랑 연 끊을 자신 있냐?"

"이미 끊고 나온 것 같은데 그쪽은 아니었나 봐."

 "그럼 우리 이거 파투 내자. 내 이 한 몸 불살라주마."

 "무슨 수로?"

 "마이찬과 형이 사귀기 전 맞선 상대 앞에서 게이인척했다는 건 들었지?"

 "됐어. 그냥 얘기 잘 할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더 보라고 들이밀면? 한번 봤으니 더 보자고 하는 건 어렵지도 않을걸?"

 "입술 한번 부비면 너한테 뭐가 좋아서?"

 "우리 지금 사귀는 사이잖아. 이 정도야. 고맙다 말 하나면 충분해."

 "그건 계약,"

 "애인 뒀다 뭐 하냐? 물론 따라 온건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다고? 너나 나나 쌤쌤이다?"

 "미안해. 얘기했어야 했는데."

 

 노선기 입에서 나오는 두 번째 사과라. 진짜 미안한가 보네.

 

 "그, 뭐가 미안해. 그럼 진짜 파투 내러 가는 거다?"

 "그래."

 

 비장하게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아까와 다른 두근거림이 심장을 관통한다. 고작 입술 하나로 노선기를 웃게 할 수 있다면 뭘 못하겠냐. 자유가 중요한 거지 암. 와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 노선기 엄청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랑? 참나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이건 우정이지.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한결이 형이 알면 엄청 놀리겠네. 

 "나오코상 죄송합니다. 저 사실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선기가 몸을 틀어 하림의 목덜미를 잡았다. 훅 끼쳐오는 커피향과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이

 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작 입맞춤 하나에, 얼음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이거 장난 아닌데? 정말 장난 아니잖아. 웃음이 터져서 선기의 손을 잡고 그대로 뛰어나왔다. 이 모든 상황이 웃기고 어이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달리고 달려 공항 밖을 빠져나오자 더운 열기가 온 몸을 감싸안는다.

"하 숨차, 도망칠 일은 아닌데 그분에게 미안하지만 재밌었네."

 

숨이 가빴는지 헐떡거리는 선기는 자켓을 벗고, 타이를 부르는데 그게 또 멋져서 멍하니 바라봤다. 촉촉했던 아까와 달리 거칠어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미쳤냐? 요즘 연애, 아니 연애를 하긴 했는데. 안 했다고 굶었냐고.

 

 "이제 이것도 여기서 끝내자."

 "왜?"

 "내가 내기에서 졌잖아. 두 달 월급은 좀 심한데 깎아주면 안 될까?"

 "헤어지자는 얘기 듣는 사람이 지는거 아냐?"

 "다른 사람을 만났잖아."

 "그래서 헤어지자고?"

 "다른 사람 사귀고 싶다며."

 "우리 아직 못 가본 데도 많고 못 먹어본 것도 많은데..."

 "진하림, 이럼 곤란한데."

 "아 뭐! 장난도 못 치냐. 나도 이제 후련하다 후련해."

 "좋아하면 말해."

 "너는 나 안 좋아하잖아."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노력할게."

 "... 좀 울고 싶어지는데."

 감정을 자각하자마자 상대방에게 들켜버린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사랑이 아프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너 생각보다 정이 많구나."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아 말실수. 계약관계이긴 했지만, 다시 해보자."

 "뭐, 뭘?"

 "아깐 뽀뽀고, 지금은 키스."

 "좀 거시기 하다?"

 "이상한 테스트긴 해도 해보면 알겠지. 아까 싫었어?"

 "싫었다기 보다 그게 그렇잖아!! 야! 잠깐, 억지로, 아."

 여기 밖인데.

 얼굴을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입술을 누르는 선기의 꾹 다문 눈매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완전히 감겼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다혈질 성격을 고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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