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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필드

여름이었다

​by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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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었다. 습도가 높아 가만히 있어도 피부가 끈적거리는 여름. 그런데도 선기는 마르고 뼈대가 도드라진 손가락엔 은색 반지를 끼고, 가는 손목엔 가죽 팔찌를 차고 있었다. 발목을 감싸는 신발에 보기만 해도 갑갑할 정도로 긴 다리를 촘촘히 감싼 긴바지까지, 여름을 느낄만한 구석은 팔이 짧은 하얀 반팔 셔츠가 전부였다.

 

“오늘 진짜 덥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 두 개 중 하나를 내밀며 하림이 말했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었지만, 하림의 등은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흐른 흔적이 가득했다. 기온 차로 튜브형 아이스크림의 표면에 맺힌 물기를 손으로 훔쳐내며 하림이 이로 봉지를 뜯고 튜브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할 말 있으면 해.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선기가 아이스크림 봉지를 두 손으로 뜯으며 말했다. 선기는 다른 거엔 둔하면서 이런 거엔 눈치가 빨랐다. 이런 게 뭐냐면.

 

 “헤어지자.”

 

 이런 거.

 

 잘근잘근 씹어댄 덕분에 뜯어진 꼭지를 바닥에 퉤 뱉은 하림이 그렇게 뜯은 아이스크림엔 입도 대지 않은 채 선기를 바라봤다. 선기는 이제 막 봉지를 뜯고 아이스크림의 꼭지를 손에 쥔 채였다. 꼭지를 손에 쥐고 흔드는 내내 둘 사이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림은 선기를 기다렸고, 선기는 아이스크림 꼭지가 뜯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톡, 꼭지가 뜯어져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고 있던 튜브가 뜯어졌을 때, 선기는 제 손가락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차갑고 축축한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며 하림을 쳐다봤다.

 

 “알았어.”

 

 빨간 혀가 손가락에 묻은 하얀 액체를 핥아대는 모습에 하림은 선기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손가락과 손등을 핥으며 제게 고정된 그 까만 시선이 생각이라는 것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었다. 노선기, 생긴 것답게 야한 새끼. 핥지나 말지. 생각에 파묻힌 하림은 그 짧은 대답을 끝으로 선기가 고개를 돌렸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쓰레기 바닥에 버리진 말고.”

 

 선기가 손가락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모두 핥아내고 꼭지가 잘린 튜브를 입에 문 채 몸을 숙일 때까지도 하림은 몰랐다. 하림이 뱉어낸 꼭지를 주운 선기가 그에게서 몸을 돌릴 때도, 잘 지내라는 인사를 들을 때도, 다음 날 아침에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일어나’라고 오던 문자가 오지 않았을 때도. 헤어지자는 말을 한 건 하림이었지만, 정작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는 거라곤 노선기의 말랑한 혀가 지독히도 야했다는 것과, 내리깐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반짝거렸다는 것뿐이었다.

 

 

1

 

 

 하림이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 건 커피 프린스를 그만두고 한 달 뒤쯤 지났을 때였다. 매일 집에 있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해 쪽쪽거렸던 날이 고작 본가로 들어갔단 이유 하나만으로 줄어들자, 다른 자극들이 눈에 들어왔다. 와플 연구를 해야 한다며 겨우 통화만 한 선기와는 다르게 반기는 친구들을 따라 만난 여자들은 적극적이고 화끈했다. 그래서였다. 너 애인 생겼다며?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닌데, 라는 거짓말을 한 건. 거짓말은 쉬웠고, 선기가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들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놓이고, 마음을 놓이니 처음 만난 여자와 입술을 맞대기가 쉬웠다. 고작 노선기라는 존재를 숨겼을 뿐인데, 하림의 주변에 온통 즐거운 것들로 가득 찼다.

 

 물론 즐기기 위해 헤어지려는 건 아니었다. 헤어져야 할 순간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선기와의 만남이 점점 뜸해지고 있었다. 하림이 만나자는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커피 프린스를 그만두기 전에도 만나자고 하는 건 언제나 하림이었다. 선기가 먼저 하는 건 아침에 일어나기 어렵다는 하림에게 매일 ‘일어나’라는 문자를 넣어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하림의 눈에 그 문자는 ‘사랑해’로 보였다. 아침에 문자 잘 받았다고 할 때마다 선기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인 채 バカ라고 하는 걸 봐선 분명했다. 비록 그 말을 들은 은찬이 너보고 바보라고 하는데 그렇게 좋냐며 비웃었지만, 사랑에 빠진 하림에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하림은 제 휴대폰에 찍힌 일어나란 문자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어제도 오고, 오늘도 온 이 문자는 과연 선기가 하림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일까?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 하림은 알았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선기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는 걸. 그 뒤로 하림은 매일 헤어짐을 연습했다.

 

 문자로 할까? 그래도 직접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전화로 할까? 하지만 얼굴을 보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미뤘던 헤어짐을 위해 약속을 잡으면 그날따라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내일 나 쉬어. 선기가 툭하니 내뱉은 그 말에 눈치 없이 아래가 당겼다. 아니, 눈치가 너무 빠른 걸 수도 있었다. 하림은 제멋대로 불끈거리는 아랫도리를 질책하며 최근의 진하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모텔로 선기를 끌고 갔다.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그곳에서 하림은 몇 번이고 선기가 부르는 제 이름을 들었다. 제발, 이제 그만. 헐떡이며 애원하는 선기의 입술을 빨아대며 한 번만 더 하자고 매달린 건 하림이었다. 그렇게 꿉꿉한 냄새가 나는 에어컨 바람이 채 식히지 못한 열기를 한껏 발산한 뒤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잘근잘근 씹어댄 탓에 온몸이 울긋불긋한 선기는 정신을 잃은 채였고, 하림은 그런 선기의 위에 엎어져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늘어졌다. 깨워서 오늘 만나기로 한 용건을 말해야 하는데, 선기의 목덜미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옅은 체향이 유난히 달큰했다. 달큰한 냄새를 맡고 있으면 눈이 절로 감겼다. 사르르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패배하고 나면 아침이었다.

 

 “진하림, 오늘 수업 없어?”

 

 전날 너무 울어서 낮아진 선기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 목소리가 야해서 하림은 제 몸을 밀어내고 일어난 선기의 손목을 잡아 다시 침대로 끌어당겼다. 11시에 체크아웃을 해야 했지만, 하림은 이제 싸구려 모텔의 추가 비용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수업 없어. 재차 수업을 묻는 당황한 선기의 귓가에 속삭인 하림이 그대로 입술을 삼켰다. 간밤에 너무 물어대서 도톰하게 부어오른 입술이 매끄러웠다. 움찔거리며 떨리는 마른 몸도, 그나마 살이 붙어 있어 쥐는 맛이 있는 엉덩이도, 아직 채 긁어내지 못한 흔적이 흘러내리는 아래도, 온통 하림을 끌어당기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우리 헤어지자고.

 

 어영부영 헤어지지 못한 채 하림은 1년을 보냈다. 그 사이에 선기는 신메뉴를 4개나 개발했고, 한결은 만날 때마다 하림에게 선기 얘기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다섯 번째 신메뉴였다.

 

 “이번에 선기가 만든 메뉴가 말이야.”

 

 한결의 말에 하림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짜증스럽게 술을 마셨다. 그 메뉴를 제일 먼저 맛본 것은 하림이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네 입맛에 맞을 것 같다며 선기가 내민 와플이 너무 맛있어서 말하지 못했다. 대신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 달라며 입술을 내밀었다. 하림은 머뭇거리다 결심한 얼굴로 다가오는 선기를 보며 생각했다. 엊그제 만난 애보다 예쁘다고. 그래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선기가 생크림을 핥기 위해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을 때, 그 뺨을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말캉한 선기의 혀가 입술 끝에 닿은 채 하림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끌려가듯 삼켜졌다. 조금 전 먹어 익히 아는 맛이어야 할 생크림이 더 달고 짜릿하게 혀에 감겼다. 그 짜릿함이 가라앉아 있었던 감정을 잠시 끌어 올렸다.

 

 싫다는 선기를 카페에서 안았다. 정말 싫어? 하지 마까? 그렇게 물었을 때 미간을 좁힌 채 선기는 짜증을 냈다. 너 진짜 짜증나. 그 말을 하림은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선기의 말은 항상 그랬고, 하림은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있었기에 대화는 언제나 그렇게 이어졌다. 응, 금방 끝내줄게. 그 말에 선기는 한숨을 쉬며 다리를 벌렸다.

 

 “…―근데 선기가 요즘 집을, 진하림. 듣고 있어?”

 

 기억이 선기의 다리를 막 잡아 벌리고 그사이를 손끝으로 더듬는 순간에 다다랐을 때 한결의 손이 하림의 눈앞에 불쑥 찾아들었다.

 

 “아씨, 지금 딱 좋은 순간이었는데. 왜에.”

 

 대화 중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건 하림이었지만,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방해받자마자 불만이 툭 터져 나왔다. 입술을 삐죽거린 하림이 눈가에 투정을 가득 담은 채 바라보자, 한결은 한눈에 하림의 기분을 알아본 것인지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제법 냉정했다.

 

 “생각이 다른 데 있네. 얘기는 다음에 하고 자리 비켜줄 테니까, 작작 해라.”

 

 한결의 말에 하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탓이었다. 뭘 작작 해? 그렇게 물으려던 하림은 제 어깨를 두드리고 펍을 나서는 한결의 뒤를 따라 일어나다가 알아차렸다. 카페에서 선기의 다리 사이를 파고든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하림의 앞섶이 불룩했다. 그래서 한결의 뒤를 따라 일어나긴커녕 하림은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앞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목덜미가 뜨끈해질 정도로 부끄러워서 한결에게 나중에 보자는 말도 하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하나, 둘, 셋, 앞을 가라앉히기 위해 숫자를 세고, 바 테이블에 양팔을 올린 채 얼굴을 파묻으며 아주 잠깐의 잠도 청해봤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조금 가라앉을라치면 가는 허리를 비틀며 헐떡이던 선기의 숨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목소리도. 진, 하림―…! 이름을 부르며 자지러지던 선기의 목소리가 연신 귓가에 맴돌았다. 소리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누가 때린 것처럼 뒷목이 뻣뻣하게 서고, 깃털이 지나간 것처럼 귀가 간지러워서 결국 하림은 술잔을 비우고 화장실로 향했다.

 

 천하의 진하림이 어쩌다 꼴랑 기억 하나에 앞을 세우는 남자가 되었을까?

 

 바지 지퍼를 내리고 두툼하게 선 분신을 손에 쥔 채 생각해봤지만, 답은 얻지 못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노선기, 노선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았다.

 

 

1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애에 종지부를 찍던 날은 오랜만에 선기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해온 날이었다. 할 말이 있다며 부른 곳은 익숙하고 좁은 골목 안쪽에 있는 홍사장의 집이어서 하림은 우습게도 쉬는 날이면 어제 부르지, 라고 생각했다. 아마 어제 만났다면 하림은 헤어지자는 말 대신 선기의 입술을 깨물고,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엉덩이를 틀어쥐었을 게 분명했다.

 

 [ 아이스크림 좀 사 와, 더워. ]

 

 홍사장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는 버스 정류장 앞 편의점뿐이었다. 조금 전에 이미 지나친 버스 정류장 말이다. 하림은 급하게 저 앞에서 세워 달라고 외치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택시로 지나쳐온 길을 되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함께하는 동안 내내 버스를 탔던 탓인지 선기는 하림이 당연히 버스를 타고 오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약속 시간에 가까운 지금,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는 연락을 할 리가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 하림은 선기와의 모든 일이 멀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미 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림은 더는 버스를 자주 이용하지 않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도 않았다. 좁고 침대도 없는 노란 장판의 낡은 집이 아니라, 옷장과 책상, 그리고 침대까지 있는 커다란 방에서 잠을 잤다. 모기를 쫓기 위해 선기가 방에 쳐둔 모기장 안에 몰래 숨어드는 일도 없이, 탈탈탈 소리를 내는 낡은 선풍기 대신 고요한 에어컨 아래에서 여름을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매일 선기와 체온을 나누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헤어지자.”

 

 선기와의 헤어짐은 당연했다.

 

 “알았어.”

 

 닫힌 문을 빤히 쳐다보며 하림은 한참이나 입에 아이스크림을 담은 튜브를 물고 있었다. 튜브를 움켜쥔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아이스크림은 온통 녹아 있었다. 뒤늦게 침을 삼키며 튜브를 빨아 당긴 덕분에 하림은 자신이 아이스크림을 반도 먹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앞에 선기가 없다는 것도.

 

 하림은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을 때까지 골목에 혼자 서 있었다. 아직도 안 갔어? 그렇게 말하며 선기가 나올 때가 지났음에도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다 녹아 달달한 액체가 되어버린 아이스크림을 빨아대며 한참 서성거린 하림이 빈 튜브와 봉지를 버리려던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발길이 닿은 곳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익숙하게 버스에 올라타며 하림은 선기와 한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오늘 약속 없지? 그렇게 시작한 선기의 용건은 오후에 보자는 거였다. 꼭 해줄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지 못한 게 하림은 조금 아쉬웠다. 혹시 내일도 쉬는 날이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오후에 보자고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기는 오늘 하림과의 밤을 보낼 생각이었을 지도 몰랐다. 홍사장이 집을 비워서 자고 가라는 얘기를 하려던 걸 수도 있고. 그렇다면 지금쯤 그 노란 장판에 쩌적 붙어대는 선기의 피부를 떼어내며 숨을 얽어대고 있었을 터였다. 하림은 순간 자신이 놓친 모든 것이 아쉬워졌다.

 

 그렇게 놓친 것들을 곱씹고 있으려니 정말로 헤어진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선기에게 고백했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래놓고 헤어지자고 하면 죽여버릴 거야, 너.

 

 네 생각밖에 안 나서 미치겠다고 매달리는 하림에게 선기는 그렇게 말했었는데, 바보 같은 진하림은 그 무서운 협박을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의 형형한 눈빛의 선기를 지금까지 기억하기엔 하림의 품에서 선기는 종종 눈을 흘기긴 해도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니까. 입술을 빨아 당기면 숨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따라오고, 팔뚝 아래를 잘근잘근 씹어대면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앞을 쥐었을 때 펄쩍 뛰던 몸을 살살 어루만지던 그때의 쾌감이 느껴져서 하림은 반바지에 손바닥을 슥슥 문질렀다.

 

 역시 아직, 아직 헤어지지 못한 게 분명했다. 슬그머니 버스 창문을 열고 버스 뒤꽁무니를 확인한 하림이 사람들 눈총에 냉큼 똑바로 앉아 문을 닫았다. 하림이 탄 버스를 따라오는 건 아무것도 없고, 에어컨 바람 외에 등줄기를 자극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위협이 없는 걸 보아 선기에게 죽을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초조함에 쥐어짜듯 움켜쥐고 있던 쓰레기를 버리기 좋게 접으며 하림은 웃었다.

 

 다음 날, 하림은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휴대폰에는 각종 광고 문자가 와있었지만, 매일 오던 문자 하나가 없었다. ‘일어나‘로 가득 차 있는 선기와의 문자는 ’아이스크림 좀 사 와, 더워.‘로 끝나 있었다. 어제 받은 문자를 곱씹으며 하림은 노선기 답지 않게 늦잠을 자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하림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마지막 문자는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는 내용이었고, 새로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새로운 문자는 오지 않았다. 그제야 하림은 알았다. 진짜 노선기와 헤어졌다는 것을. 1년이 넘도록 질질 끌어댄 연애가 드디어 끝이 나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죽여버린다고 했으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린 하림이 고개를 들어 거울을 찾았다. 거기엔 멀쩡한 얼굴의 진하림이 헤어짐을 인정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림은 당장이라도 휴대폰으로 선기에게 연락을 해서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하림은 선기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연락하면 어떻게 우리가 헤어지냐고 선기를 붙잡고 울 것 같았으니까.

 

 하림은 입술을 꾹 깨물고 헤어짐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을 죽이러 노선기가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헤어졌다고.

 

 헤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이런 아픔은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고통이라, 하림은 이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제대로 몰랐다. 그래서 날것에 가까운 고통에 허덕이다 방법을 찾듯 클럽으로 향했다. 춤을 추고, 여자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선기에 관한 생각이나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하림이 느끼는 고통은 모두 거짓이니까. 헤어지고 혼자가 된 자유를 느끼는 게 정상이니까. 그래서 하림은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호텔로 갔다.

 

 “애인 있을 것 같은데, 아냐?”

 

 능숙하게 입을 맞추는 하림의 입술에 매달린 채 뒷걸음으로 침대까지 도달한 여자가 물었다. 자신도 있다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준 여자는 관계는 오늘만이라고 하림보다 먼저 못을 박았다. 그런 여자의 말에 잠시 눈을 껌뻑거린 하림이 대답했다.

 

 “당연히 있지이.”

 

 그 말에 여자는 혼자만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하림은 웃지 못했다. 그는 며칠 전 애인과 헤어진 남자였으니까.

 

 하림은 그날 결국 여자와 밤을 보내지 못했다. 애인이 아니면 안 되는 거 아냐? 여자가 올이 나간 스타킹을 벗으며 물었지만, 하림은 대답 대신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두툼하게 하림을 감싼 이불 위로 여자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물건은 실한데, 아쉽게 됐네. 혹시나 헤어지면 연락해, 맛 좀 보게.”

  

 여자는 하림을 순정남이라고 불렀다.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여자가 호텔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하림은 애인을 두고 바람도 피우지 못하는 순정남이 되어 있었다. 우스운 얘기였다. 선기와 헤어지기 전까지 클럽에서 만난 여자는 수없이 많았고, 지금은 선기와 헤어져 혼자가 되었는데 온통 머릿속에 선기뿐이었다.

 

 하림은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선기와 주고받은 문자를 열었다. 심장 안쪽에 숨어 있던 감정이 어서 선기에게 연락하라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떠밀리듯 휴대폰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며 하림은 다양한 말을 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싶었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오늘 만날래, 같은 말들은 쓰기 전에 시계를 보고 지우기도 했다.

 

 미안해, 보고 싶다 선기야,

 안고 싶어 노선기,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백퍼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기야. 나한텐

 선기야, 노선기, 너밖에 없어

  

 '미안해'로 시작한 문장은 너밖에 없다는 유치한 말로 끝났다. 몇 줄 되지 않은 문장인데도 선기의 이름이 가 득했지만, 하림은 계속 그 이름을 담았다. 선기야, 노선기. 이불 속에서 웅얼거린 하림이 이내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잠들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은, 모두 하림이 잠에 깊게 빠지면서 휴대폰을 손에서 놓친 덕분이었다. 손에서 스르륵 미끄러진 휴대폰이 이내 화면을 끄고 하림과 함께 잠들었다. 늦은 아침에 하림이 일어나 깨우기 전까지, 푹.

 

 

 

1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낮에는 학교에, 밤에는 클럽에 출근 도장을 찍어댄 하림은 결국 앓아누웠다. 더위를 먹은 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냉방병에 가까울 터였다. 온도계가 고장이 난 것처럼 덥고 추웠던 몸이 겨우 정상으로 돌아오자마자 하림은 휴대폰을 켰다. 휴대폰엔 괜찮냐는 말 대신 오늘도 클럽에 못 오냐는 얘기만 가득했다. 어떻게 걱정하는 놈 하나가 없냐. 땀에 젖은 잠옷을 벗어 던지며 하림이 투덜거렸다.

 

 뽀송한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오면 삭막한 대리석이 하림을 반겼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집에는 하림 외엔 아무도 없었다.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밥이나 먹자. 하림은 손바닥으로 배를 문지르며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근처 죽집에서 사 왔을 죽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뜨끈해진 죽을 한술 뜨면서 하림은 눈가에 촉촉하게 모여드는 제 눈물을 비웃었다. 전문가의 솜씨로 만들어져서 영양도, 맛도 훌륭한 죽인데 먹는 내내 선기가 끓여준 밍밍한 죽이 떠올랐다. 죽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근본을 알 수 없는 것을 끓여온 선기는 하림이 무슨 맛인지 모를 그 죽을 다 비울 때까지 앞에 앉아 있었다. 입에는 안 맞았지만, 눈에는 꼬옥 들어차서 하림은 그 엉망인 죽을 깨끗하게 비우고 한 그릇 더 달라는 말도 했었다.

 

 “그랬었네.”

 

 죽이 맛있었던 게 아니라, 죽을 먹는 내내 앞에 앉아서 종종 반찬이나 올려주는 선기를 보는 게 좋아서 한 그릇을 더 받아먹었었다. 그렇게 갑자기 많이 먹다간 배탈 난다. 그 말에도 꾸역꾸역 먹었다가 정말로 배탈이 나서 선기가 밤새 병간호도 해주었다. 밤새 그렇게 다정했던 주제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등신이라고 놀리는 것도 노선기다워서 하림은 그 말에 실실 웃어댔었다.

 

 “진짜 등신이네.”

 

 부모님이 사다 두셨을 죽은 영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림은 처음 뚜껑을 열었을 때와 달라지지 않은 죽 그릇을 바라보다 이내 뚜껑을 덮었다. 아직 식지 않아 뚜껑이 불룩하게 부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비닐봉지에 다시 그릇을 담고 반찬도 꼼꼼하게 챙겨서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송보송한 새 잠옷을 벗고 조금 전 벗어 던진 잠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 서늘하게 젖어 꿉꿉한 느낌이 피부에 닿아 불쾌감을 만들어낼 법도 했지만, 하림은 그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손에는 죽 봉지를 든 하림은 잠옷에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택시 대신 버스를 탔다.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느낌의 시선을 받은 건 처음이지만, 뭐 어때.

 

 슬리퍼를 질질 끌고 하림은 버스에서 내려 길고 좁은 골목을 걸었다. 오늘 쉬냐는 연락은 하지 않았다.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하림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홍사장의 집 앞에 쭈그려 앉았다. 발치에는 죽그릇이 담긴 봉지를 둔 채였다.

 

 “…―뭐야.”

 

 문 앞에 웅크리듯 앉은 하림이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얼굴 가득 담은 채였다. 그렇게 고개를 들면 조금 마른 것 같은 선기가 하림을 보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봐선 혼자 퇴근한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이런 모습을 선기 외의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자신은 사실 조금 없었다. 하림은 자신을 바라보며 눈가를 찌푸리는 선기의 표정에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선기야, 노선기이. 하림의 부름에 선기가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개새끼.”

 “나 아파.”

 “나쁜 새끼.”

 “상사병인가?”

 “죽어버려.”

 “죽 끓여줘.”

 

 하림은 죽 봉지를 내밀었다. 눈가가 벌겋게 물든 선기가 죽 봉지를 낚아채곤 철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익숙해서 하림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선기의 뒤를 졸졸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익숙하게 선기 방의 문을 열고 발가락으로 선풍기를 튼 뒤, 잘 개어둔 이부자리를 폈다. 오는 내내 버스에서 말랐다가 다시금 땀에 쫄딱 젖은 잠옷을 벗고, 선기의 옷장을 열어 하림이 종종 입었던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이렇게 모든 게 익숙한데, 하림은 혼자서 선기와 제가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킁킁, 오래간만에 맡는 선기의 냄새에 하림이 잔뜩 취해있는 사이 선기가 따끈하게 끓인 죽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먹고 가버리라는 말은 이미 잘 준비를 마친 하림 탓에 쏙 들어간 모양이었다. 꼴도 보기 싫다는 감정을 얼굴에 띄운 선기가 죽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밀어 넣은 하림이 우물우물 죽을 씹어대며 선기에게 물었다.

 

 “오늘 집에 혼자야? 아무도 안 들어오나?”

 

 뾰족하게 서는 선기의 눈매를 보며 하림은 죽을 입에 문 채로 히, 웃었다. 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가 가득 찬 방에 대답 대신 선기가 하림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여름이었다.

 

 

 

1

 

 

 여름의 끄트머리에 선기가 말했다.

 

 “앞으로 여기 오지 마.”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면 선기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귀가 유난히 귀여워서 고개를 들어 쭙, 빨아대면 선기가 목 안쪽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다음엔, 읏, 우리 집으로 와.”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집? 우리 집? 자기도 모르게 되물은 말에 선기가 입술을 말아 무는 게 보였다.

 

 하림은 시선을 도통 두지 못하는 선기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부루퉁하게 부푼 입술에 쪽쪽 찾아들었다. 멈출 수 없었다. 하림은 이 말을 이제야 들었다는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말해주는 선기를 향해 달려가는 감정을 멈출 수도 없었다.

 

 “선기야, 노선기이. 너 지인짜, 너어무 이쁜 거, 알지?”

 

 하림의 말에 선기가 그제야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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